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도연맹 학살 사건 (문단 편집) ==== 지역별 학살 현황 ==== 6월 하순부터 전국적으로 학살이 시작되었다.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의 후퇴와 함께 이뤄졌다. 처음에는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학살이 있었고, 이후에는 삼남 지역으로 내려갔다.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점령할 때까지 시간이 걸렸던 충청, 호남, 서부 경남 지역에서는 7월 경에 대량 학살이 있었다.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대전, 공주, 전주, 목포, 진주, 대구 지역은 형무소가 있었는데, 여러 지역에서 군경이 후퇴하기 직전에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고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 또한 보도연맹 학살과 북한군의 학살이 맞물리면서 충청, 호남, 서부 경남 지역은 내걸린 국기가 바뀔 때마다 좌우가 서로 번갈아가며 보복 학살을 벌였다. 특히 북한군이 점령하지 못했던 낙동강 방어선 안쪽 지역(대구 이남 지역)과 제주 지역에서의 학살은 너무 끔찍하고 규모 면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 {{{#!folding ※ 보도연맹원 학살 관련 증언 및 자료 내용 펼치기·접기 (클릭·터치) 특정 지역의 학살과 밀접하게 관련된 증언일 경우에는 아래에 후술된 지역별 학살 문단에 수록하였으므로 참고 바람. >배경 있고 후원자 있는 사람들, 돈 가져온 사람은 차에서 내리고... 찌끄랭이는 다 죽고, 아무데다 개 죽이듯 막 죽이잖아. >---- >유족 이수기의 [[https://youtu.be/TiPv_tZ-F64?t=2m16s|증언]] >"1960년 국회에서 양민학살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게 국회속기록으로도 지금 남아있는데요. 그 속기록을 보면 1950년 7월 15일 마산형무소로 잡아갔던 보도연맹원들 중에서 여성이 50명이 있었고, 그 50명 중에 강간에 응하지 않은 3명이 학살되었고 강간에 응했던 47명이 풀려났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 학살된 희생자들 중에는 일제 시대[* 원(原) 증언을 인용한 것임을 고려하여 수정할 수 없으나, 일제 시대라는 말은 [[지양]]해야 하는 표현으로, '[[일제강점기]]'라고 지칭해야 한다.] [[독립운동가]]들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런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의 증언 >"광산에 갔어요. 6.25 사변 나고... 광산 가는 길로 갈 때 이미 각오했어요. 끝이다... 이젠 아무 것도 바랄 것도 없고... (좌익) 행동한 사람, 안한 사람 구별하길래 나는 행동 안했으니까 안했다고 주장했고 끝까지 주장을 하니까 인정을 해줘서 살아 나왔지..." >---- >학살 생존자 김종철의 [[https://youtu.be/AQUZWLg9mmA?t=6m33s|증언]] >"올 때 트럭에 한 가득 싣고 왔어. 그 다음 차가 또 사람들을 싣고 재를 넘었어. 천으로 뒤로 묶어 내리게 하고 안 풀어줬지. 총 소리가 팡팡팡 나고 탄피가 나돌았어. 나중에 보니 전부 죽어 누워 있더라. 신발이고 옷이고 전부 뒹굴었어. 좀 있다 올라와보니 뼈가 나와 있었지.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묻은거야." >---- >경남 의령지역 학살에 대한 목격자의 증언 >"아주 잔혹한 장면들이 충분히 연상되는 그런 모습들이었어요. 큰 구덩이 속에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있는 상태에서 위에서 말이죠 약간 높은 곳에서 아래쪽을 보고서 이렇게 총을 난사했던 그런 결과로 살해된 유골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중의 일부는 아마 총을 맞고도 바로 죽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기어 나가는데 그 모습 그대로 이렇게 머리에다가 총을 쏘아서, 얼마나 당시 모습이 참혹했겠느냐 하는 그런 것이 짐작이 됐죠." >---- >여양리 학살지 유해 분석가 김재현 교수의 증언 >"1948년에 내가 다니던 안성농업학교에는 '민주학생연맹'이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나는 여기에 가입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어. 소년원에서 살다가 1949년 8월에 석방되었는데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서 법률공부를 하고 있다가 6.25를 만났지. 전쟁이 나니까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그때가 1950년 7월 5일경이었어. 우리 집은 이천군 설정면 수산리였는데 가보니 이미 7월 1일에 보련맹원들이 끌려가 학살당했다는거야. 경찰에서는 나를 찾다 내가 없으니까 대신 아버지를 끌고가 학살시켰던 거야. 장소는 장호원면 '밀목'이라는 곳이었는데 아버지 시신을 찾으려고 학살현장에 가니 그 참상은 말도 못했어. 총상입은 데는 구데기, 파리가 들끓고 피가 시커멓게 썩어 있었어. 시체를 운반할 수 없어서 10구는 가매장하고 20여 구는 그 자리에 흩어져 있었지." >---- >학살 생존자이자 유족 이천재의 증언 >"죽어도 억울하게 죽은 거야. 그때는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 죽였어. 무서워서 나는 숨었어. 이틀 뒤 알았어. 희율이가 골로 간거. 산에서 총소리가 나 감으로 알았지만 죽였다는 생각은 못했어. 공산주의가,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경찰이 미전고개 골로 끌고가 죽였어. 땅에 묻지도 않았지." >---- >밀양 삼랑진읍 학살에 대한 목격자의 증언 >"내가 형무소에 잡혀 들어간 날은 한국 각지에서 군인 경찰들이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도 없이 무차별 총살한다고 미군 당국에서 한국에 강력하게 항의한 다음날이었지. 내가 숨어있는 동안에 형무소에 끌려들어간 사람은 죄다 죽었고, 내가 들어갈 때도 사람들이 수없이 잡혀 들어왔어... 어느날 내 차례가 되어 명령대로 형무소 마당에 늘어섰지. 앞 사람들이 트럭에 실려 가는데 내 차례가 되자 갑자기 누가 옆구리를 쿡 쑤시는 거야. 돌아보니 군인 하나가 날 보고 '아니! 김 선생님 아니십니까?'하고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더군. 가만히 보니 일제 때 내가 이북에서 선생으로 있으면서 가르쳤던 제자인 거야. 서북청년단으로 내려와 학살에 가담하고 있던 제자였어. 그가 날 옆으로 비켜 세우는 거야... 우리가 빠지니까 끌려가는 행렬들은 우는 낮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당신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 세상에 이 원통함을 알리고 원수를 갚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떠났어. 그날 나와 [[노백용]] 씨 말고는 전부 죽었지." >---- >보도연맹원이자 학살 생존자 [[김정한#s-1]]의 증언 >"남자들 주먹만한 돌 있지 않습니까. 그 돌을 바지에다가 꽉 넣으라고 했다는 거예요. 열 명씩을 다시 묶어 가지고 돌이 있는 대로 달린 사람을 밤중에 뱃전에 딱 세워서는 중간에 차버림련 다 딸려가 물에 넘어지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악랄하게 죽이냐 이 말이죠." >---- >유족 효전스님의 증언 >"(부친)이 목포로 가서 교도소에서 하룻밤을 잤어요. 그 이튿날 달밤에 배에 싣고 가서 일일이 간수들이 허리찍는 기계로 하나씩 찍어서 바다에 넣었어 버렸어요. >---- >유족 노진곤의 [[https://youtu.be/AQUZWLg9mmA?t=15m13s|증언]] >"비가 많이 와 가지고 도랑에 물이 내려가는데, [[혈액|물이 벌게]]." >---- >맹노환, 당시 학생이었던 주민[* 말에 따르면 차에 타거나 국군을 따라가지 않아 화를 피했다는 듯하다.] }}} 그 밖의 학살 관련 신문 기사들이나 경험담들은 다음의 링크들을 참조 바람. [[https://cafe.daum.net/historywar/2LjP/1635|링크 1]],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05|링크 2]]. [[양산시|양산군]] [[웅상|웅상면]], [[합천군]] 가회면, [[영동군]] 용화면 등 몇몇 지역에서는 면장이나 경찰 중 [[의인]]이 있어 무고한 사람들이 끌려가 죽는 것을 막아서 희생자가 적었다고 한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8035|#]] 이들 중 몇몇은 그 대가로 자신이 목숨을 잃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